NLP and others
28 March 2021
내가 전태일 열사를 만날 것은 마치 필연이었던 것처럼 시간과 장소가 신기하게 맞아 떨어진다. 긴 중국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곳은 서울시 중구였다. 코로나 때문에 다니던 수영장이 문을 닫아 러닝을 시작한 곳이 청계천이다. 러닝을 매일 아침 하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전태일 기념관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태일이라는 인물과 청계천의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됐다. 10대의 대부분과 20대의 초중반을 해외에서 보냈던 나에게 청계천은 그냥 “도심 속에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좋은 곳” 이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그러한 역사가 있었던 곳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 묘했다. 몇십년 전에는 이곳이 “인간공장”의 중심이었고,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분신자살을 했던 곳이라니, 그렇게 한국에 작지 않은 변화를 만들었던 역사적인 장소라니,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아침마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러 오는 조깅하는 장소 정도로만 생각했던 내 스스로가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달까…..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청계천에서 조깅할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달리고 있는 이 장소가 몇십년 전에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니! 달리면서 주변에 있는 높은 건물들을 옛날에 있었을 낡은 공장들의 이미지로 오버랩 시키면서, 그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서울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다. 이사한 지역에서 서점들과의 접근성이 좋아져서 시간이 날 때 종종 서점에 들러 책을 한아름씩 사왔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책장에 꽂혀있던 <전태일 평전>이라는 책. ‘어? 그 전태일이 그 전태일인가?’ 하는 마음으로 호기심에 책을 꺼내서 훑어보니 바로 그 전태일이 맞았다. 신기한 마음으로 다른 책들과 함께 품에 안고 귀가했다.
호기심과 신기함에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숙연해졌다. “노동시장의 부당함과 싸우기 위해 분신자살 한 전태일 열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그의 일생을 낱낱이 알게되니, 당시 노동현장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참담한 노동현장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면서도 주변의 여공들을 최선을 다해 챙기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노동의 부당함과 싸우기 위해 “바보회”를 창립하여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끌기까지 한다. 그 당시, “노동”, “노동운동”이라는 말은 거의 금기어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설득하여 싸우고 또 싸운다. 그를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들과 그가 느껴야했던 수차례의 좌절들은 책으로 읽는 내 심정까지도 참담하고 힘이 들 정도다. 너무 뿌리 깊게 박힌 부패된 사회의 현실은 그의 희망과 노력을 꺾고, 꺾고, 또 꺾었다. 가난해서, 학구열이 강했음에도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그가 노력과 열정으로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아내고 집요하게 공부한다. 온갖 방법으로 공장들의 노동 실정을 조사하고 통계를 내서 노동청에, 정부기관에 가져가 호소해보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도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그 제도들은 허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체념한다. 그리고 결국 이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본인의 죽음임을 깨닫고 <근로기준법> 책을 품에 안고 스스로를 불태워,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개 노동자의 목소리는, 죽어야만 세상이 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의 죽음은 전국적으로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시점이 되었고, 전국적으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시위를 하며 목소리를 본인들의 냈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학교를 다니는 동안 배움의 즐거움에 “한없는 행복감”을 느꼈던 10대 소년, 그저 기계가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고싶었던 사람. 누군가는 당연히 누리는 것들을 죽을 때까지도 느낄 수 없었던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하고 숙연해졌다. 다시한번 내가 가진 것들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있는 것임을 되뇌이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지금 이 시대에도 보이지 않는 많은 분들이 크고 작게 노력하고 계시기에 사회가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책에 담겨있는 생전 전태일 열사가 수기로 작성한 많은 기록들은 그의 학력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뛰어난 통찰력과 글솜씨를 보이고,
저자인 조영래님의 전태일 열사 연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책 한장 한장에서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은 책이고,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훌륭한 고전책 중 한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